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농촌사회에는 모심기, 김매기, 수확 등 농번기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공동으로 노동하는 이른바 <두레>라는 공동노동조직체가 삼남지방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레라는 공동노동조직체는 이른바 <촌계(村契)>의 한 부분으로, 촌계에서는 촌제(村祭)와 두레, 촌회(村會) 등을 운용하고 있었다. 촌계의 존재는 왕왕 마을의 형성과 그 역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자생적이며 공동체적인 성향을 지닌 기층민들의 상규상보하던 조직체였다.
이른바 촌제라는 것은 산신제, 동제, 서낭제, 당굿, 마을굿 등의 이름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전국적으로는 <동제(洞祭)>라고 부르는 경우가 가장 많다. 동제는 자연촌의 주민들이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자연재난을 면하고 온전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혀 신명(神明)에게 비는 취지에서, 마을마다 연 1회 혹은 2~3회 제사를 지내는 행위로, 농촌의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제사의 대상이 되는 제신(祭神)은 주로 산천, 서낭 등이다. 마을 근처에 신단(神壇), 신목(神木), 신당(神堂) 등을 마련하여, 일종의 신성구역인 신역(神域)으로 삼고, 동제 때만이 아니라 항상 마을을 재난에서 보호하고 풍년을 보장해주는 지신(地神)이나 신령님으로 숭상하고 있었다.
대개 이 제신을 공동으로 모시는 주민들은 자연촌을 단위로 촌계를 조직하고 있으니, 촌계자체는 물론, 촌계의 구성원인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사신집단(祀神集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모시는 신체(神體)는 흔히 큰 바위나 나무이며, 제신은 산신, 서낭신 등의 자연신이다.
제사의 모습을 살펴보면, 제사에는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대표를 제관으로 선정하여 제사를 지낸다. 제관의 선정기준은 마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을에서 신망 있는 장년 남자 중 지날 1년 동안 재난을 당했거나, 가족 중 사망 또는 해산한 자가 없는 등, 부정과 관계가 없을 것을 엄중히 요구하였다. 제관은 보통 <산주> 혹은 <제주>라고 부르는데 보통 3명을 선출한다. 한 명은 축문을 읽는 사람이고 한 명은 제물을 신전에 진설하는 사람이며, 다른 한 명은 제물을 조달하는 사람이다. 제관들은 직업적인 봉사자가 아니라 제사 때마다 주민 중에서 선정되는 등, 모두가 옛 풍습의 잔재라 할 것이다. 제사는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지내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지만, 제관의 운기(運氣)에 따라 조정되기도 한다. 제일이 정해지면 7일 내지 20여 일 전부터 근신재계(謹身齋戒)가 시작된다. 즉 제관은 부정한 것을 보지도 않고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심신의 청정화에 힘쓰는데 다른 주민들도 자신과 마을의 청정 유지에 협력한다. 제관의 집에는 금기(禁忌)의 표식으로 금줄을 쳐서 부정의 접근을 막고 외출도 삼간다.

제사에는 제관만이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제사는 보통 밤 12시 경에 지낸다.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정을 금기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니 고요한 밤중에 엄숙히 지내는 것이다.
먼저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절차로, 신사(神祠)가 있고 그 안에 신위(畵像 또는 位版)가 있는 곳은 그 앞에, 신목만 있는 곳은 그 신목에 종이나 헝겊을 붙여서 신체로 하고, 제단만 있는 곳에서는 지방(紙倣)에 신명(神名)을 적어서 세우고, 이 신위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제관은 분향(焚香)하여 강신(降神)을 빌고, 이어 헌작(敵爵: 初獻, 亞獻, 終獻), 천찬(薦饌), 독축(讀祝)을 한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축문을 불태우고, 또 백지를 사각으로 짜른 것을 촛불로 태우는 소지(燒紙)를 하면서, 1년 동안의 마을의 평안과 기풍(祈豊)을 한다. 소지는 주민 각자의 소원을 신에게 기원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한 장만을 태우기도 하고 전 주민 모두가 한 사람이 한 장씩 태우는 경우도 있다. 종이가 잘 타서 한 쪽도 남김없이 훨훨 잘 타면 그 사람의 소원이 신에게 가납(嘉納)된 길조(吉兆)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이니, 그 사람은 1년 내내 조심하고 삼갈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관 및 제의에 참여하였던 마을의 주민들이 그 자리에서 진설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싸 주기도 하는데, 이를 음복(飮福)이라 한다. 음복은 신성한 신역(神域)에서 신이 잡수신 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과 한가족이 되어 재액(災厄)을 면하고 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음복은 본래의 취지로 보면 전 주민이 참여할 것이므로, 제물의 대부분은 등분(等分) 혹은 적당하게 전주민에게 분배되며, 집집마다 가족 일동이 또 음복한다.

동제에 드는 비용은 대개 촌계에서 조달해 주거나 각 호마다 갹출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동제가 쇠미해졌을 때는 비용도 안들겠지만 동제가 농촌의 큰 오락적 연행사로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던 시절에는 소(牛)도 잡는 등 꽤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동제의 전통이 오래된 만큼 지역적인 특색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동제의 내용이나 외모가 거의 대동소이하여 각별한 특색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제신이 자연신인 까닭으로 주민과 제신 사이에는 친밀한 문화적, 사회적, 또는 혈연적, 지연적 관계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 주민들은 제신을 두려워하고 경원하면서도 그 영력(靈力)을 믿고 그것을 마을의 제재초복(除災招福)에 활용하게끔 기원하고 있다.
즉 주민들이 이 신에 제사지내면, 신은 이에 답하여 마을의 재난을 막고 복을 준다는 공리적(公利的) 측면이 있으면서도, 제사는 신에의 접근, 신에의 동화 내지는 인간의 신화(神化) 즉 심신을 정갈히 하고 치성을 드리면 자신의 신성(神性)을 발취하여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는 취지로 제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동제는 촌락사회의 사회적 행사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동제가 공동체적인 친목을 다지는 기회이며, 또 공동체적인 향토오락으로서 으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전 주민이 공동으로 동제에 참여하고 한 곳에 모여서 잔치, 곧 동연(洞宴)을 베풀고, 음복하며, 이를 기회로 동회(洞會)를 여는 등, 촌락공동체의 튼튼한 유대를 형성해주는 것이 바로 동제였다.
동제의 모습을 관찰하면 일견 유례풍(儒禮風)이다. 제관이라는 명칭이나, 제의절차에서 분향, 헌작, 한문으로 된 축문 등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 대상이나 축원 등의 내용은 종래의 무속, 이른바 음사(淫祀)의 그것이니, 오랜 전통에다가 유교의례의 형식을 도입한 데 불과한 것이다.
동제가 즐나면 마을회의를 한다. 마을회의에서는 동제에 대한 결산과 일상적으로 동네에서 필요로 하는 공공시설의 유지, 보수, 동임원의 선출, 동비의 출납보고, 축제 운용 등을 상의하거나, 농사의 지도, 영농상의 문제점 해결, 생활상의 문제점 해결, 관혼상제 등에 대한 상부상조식의 제정, 두레에 관련되는 일 등을 관장하였다.
말하자면 동제를 주관했던 촌계는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고 실제적으로 운용하던 주체였던 것으로, 한 마을이 흡사 하나의 대가족을 구성한 듯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침략할 때, 영국은 인도의 농촌공동체의 침체를 <정체(停滯)>의 심연으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영국의 침략을 필요악으로 미화하였다. 이는 칼 마르크스의 이른바 ‘아시아적 징체성’ 이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던 일제의 제국주의도 이 이론을 크게 활용하였다.
즉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19세기 말의 조선의 정체성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며, 일제의 침략은 이 정체성을 타파하고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한 필요악 내지는 구세주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농촌 공동체에 대해서는 한국인 학자들도 탐탁찮게 본 것만은 사실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의 기본 정책은 우리의 전통에 대한 부정에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 촌락사회의 고유한 촌계의 중요한 정신적 기반이었던 동제와 마을 굿을 낭비적인 미신(迷信)이라 하여 금압하는 등, 일제 초기까지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던 촌계, 마을에서의 가족적인 단합을 온갖 명목으로 탄압하였다.
종전의 조선사회가 수전농업사회가 일반적으로 지녔던 속성에서 연유한 정체성과 페쇄성을 지닌 것만은 사실이지만 촌계에서 보이는 인정과 상호부조는 바로 오늘 날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중요한 자원이자 전통인 것이다.
우리 나라 여타지역이 모두 그러하듯이 구리시의 마을신앙도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것이현 실정이다. 더구나 구리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인접하여 주민들 중의 많은 수가 구리시의 원주민이 아닌 타 지역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마을신앙의 전통도 급격하게 쇠퇴, 혹은 축소, 변모하고 있는 것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재 남아서 시행되고 있는 구리시의 마을 신앙을 통해서 몇가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 각 마을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신앙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 교문동 한다리마을 대동고사
    □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 수택동 수늪마을 산치성
    □ 수택동 검배마을 서낭나무 고사
    □ 수택동 이촌마을 산치성
    □ 인창동 궁말 산치성
    □ 인창동 동창마을 산신제, 부군제
    □ 사노동 산치성
    □ 언재마을 산치성
    □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
    □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

이상이 이번의 조사에서 드러난 마을신앙의 종류들이다. 이를 통하여 구리시 마을신앙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마다 제명(祭名)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산신신앙>과 결부되어 있으며,
둘째, 산신신앙과함께 <도당굿>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토평동 벌말, 수택동 이촌마을, 인창동 동창마을, 사노동, 갈매동 담터마을과 도촌마을).
셋째, 현재는 도당굿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으나, 예전에는 모두가 도당굿의 형태를 지녔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넷패, 몇 군데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제일(祭日)이 대부분 음력 10월 초순에 집중되어 있으며, 10월이 아닌 경우는 인창동 동창마을 산신제(음력 1월 1일),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음력 2월 초하루),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음력 3월 3일) 등이다.
다섯째, 산신신앙과 함께 신목(神木)을 모시는 고목제(古木祭)가 나타난다(교문동 한다리마을, 수택동 검배마을, 사노동 등).

이외에 토평동 벌말에서 조사된 정제(井祭), 즉 우물고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널리 조사되는 마을신앙의 한 형태로 구리시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아천동 우미내마을의 나무장승, 인창동 응달말과 양지말의 돌도깨비, 사노동 등에서 장승신앙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우리나라 마을신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산제(山祭) 혹은 산신제(山神祭)와 당제사, 당고사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산제를 드리는 신체(神體)나 장소를 당(堂)으로 관념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대체로 우리 나라 마을신앙의 경우는 상당신(上堂神)과 하당신(下堂神)의 구분이 있는바, 상당신은 바로 산신을 의미하며, 하당신은 산신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장승이나 솟대, 탑, 우물 등에 제사를 올리는 하당신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하당신을 모시는 신앙도 크게는 상당신을 모시는 산신제의 연장선상에서 제의가 열리는 경우이므로, 현재는 마을에 따라서 산신을 모시는 상당신의 제의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는 모두 산신제와 연결되는 제의(祭儀)의 한 형태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볼 떼 구리시의 경우 현재는 산신제의 흔적이 없이 하당신격인 서낭나무를 모시는 제의만 남아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결국 이 제의들도 모두 산신제와 연결되고 있다.
구리시의 산신제가 도당굿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유래가 오래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서는 산신은 곧 천신(天神)이었다. 사람들은 천신, 곧 하늘과 교통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날짜를 정하여 산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미미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천신인 산신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신을 만날 수 있는 대표를 뽑아서 산신을 만나도록 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마을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祭官)들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제관은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특히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에서는 정치와 제의가 서로 구분이 없어서 행정의 기능과 종교의 기능이 하나로 합치되어 있었으나, 점차 이 기능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제정일치사회에서는 행정을 담당하는 존재나 종교를 담당하는 존재는 모두 하나로서, 하늘의 점지가 있어야만 이를 담당할 수 있었고, 제정이 분리된 시대에도 종교를 담당한 자들은 특정한 신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말하는 무당들인 것이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는 제사가 바로 정치였으며, 당은 곧 제사와 정치를 동시에 집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당의 의미는 대청(大廳), 대옥(大屋), 제사를 지내는 장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 등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대 사회 이래로 자치적인 기능도 함께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마을 제의가 끝나면, 마을 공회당에 주민들이 모여 올해 마을에서 행할 행사를 의논하고 지난 해의 일을 되돌아보는 등의 행사가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