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l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우미내마을 입구에서 검문소를 바로 지나 구리시에서 워커힐 쪽으로 가는 도로 오른쪽 녹지에 조그만 당집이 있다. 이 고개는 예전부터 ‘비냥고개’ 혹은 ‘서낭고개’라 불렀다. 서낭당 위로는 금줄이 처져 있고 금줄 사이사이에는 지전(紙錢)이 꽂혀 있다. 당집 위 부분에는 적색 · 백색 · 녹색 · 황색 깃발이 꽂혀 있는데, 황색 깃발은 깃대가 꺾여 있었다. 검정색 깃발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깃발 색깔로 보아 오방색(五方色) 깃발을 모두 갖추어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낭당은 우미내마을에서 모셔지는 서낭님을 모셔놓은 곳이다. 마을 노인회장인 이종서씨는 이 서낭당에 모셔지는 서낭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종서 : 이 서낭당이 지금 이제 저희 동네 수호신이시자 서낭님이신데, 그게 연도는 말이예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생각할 때 거의 고구려 말엽이 아니겠냐 이런 생각이 갑니다. 우리 선대 선대 때부터 쪽 이어내려 왔으니까요. 그저 추정으로 그렇게 생각이 갑니다. 그런데 육이오 당시에는 말이에요, 이 동네 피난을 대략 서울 분들이 이 동네 많이 와 계셨어요. 그런데 그 때 관료 출신들이 대략 이리 피난을 오셨었어요. 뭐 순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그래가지고 그 분들이 여기서 9 · 28 수복 이후에 아주 이 동네가 깨끗하고 무사하게 피난을 했다고 해서 그 분들이 해마다 성금을 바치고 했었어요. 이 동네 치성 때문, 그리고 그 단장을 해 드리고, 그 서낭신에 대해서 아주 그 당시만 해드래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이 무속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나 이 분들한테 뭐 물어 보잖아요. 그러면 어느 서낭신한데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데, 다 이 서낭님이래요. 그래 지금도 저렇게 됐는데요. 늘 찾아 오셔서 약주 부어 놓고 정성들이고 과일 같은 거 늘 나가면 있어요.

이렇게 오래되고 영험이 대단하다고 믿어지는 서낭님을 모신 서낭당은, 원래 구리시에서워커힐 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비냥고개 혹은 서낭고개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칠 때면 반드시 돌을 던져 서낭에게 인사드리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된 것은 원래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로 도로가 뚫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종서 : 그래서 그 서낭님을 당시에는 참, 원래 위치가 여기가 아닌데…. 요 아래 이렇게 오시다 보면은 참, 고개가 있어요. 고위 산 쪽으로 아주 각을 정교하게 잘 짓고 모셨었습니다.
    조사자 : 현재 위치보다 더 아래쪽에 모셨었나요?
    이종서 : 예. 요 광장동 쪽으로. 그러니까 광장동이 아니지, 내려가는 길 쪽으로, 구리시인데. 그래서 참. 동네에서 매년 음력 초삼일 안으로 날을 잡아가지고요, 인제 그 동네에서 제주를 정합니다. 매년.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해서 동네에서 쌀도 내고 돈도 내시고 해서, 그 제수 용품이라든지 이런 것을 차려서 매년 그 무병장수를 빌고 동네 발전을 빌었었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육이오 사변 이후에 도로 내는 관계로다가 그게 싹 없어졌었습니다. 원래 있던 자리가 길로 들어가고.

이 서낭당에 모셔진 서낭신에게는 인근의 장자못과 연관된 유래담이 전한다. 이 유래담은구리시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이야기이다. 제보자 이종서 씨가 말하는 서낭신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종서 : 그 서낭신의 유래를 잘 아시겠습니다만은, 옛날 아주 부잣집 며느님이래요. 그래 요 위에 가시면 장자못이라고 있는데, 그 장자못이 옛날에 아주 부자 장자가 살았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분이 잘 사니까 하늘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잘 살피고 오너라 해서, 그 성인이 한분 마음을 살피러 내려왔대요. 그래서 스님이 되어서 바랑을 지고 그 집에 가서 동냥을 하는 거죠. 그랬더니 주인어른이 마음이 나빴으니까 그러겠죠. 중이 오니까 소 외양간으로 데리고 가 가지고. 소똥을 한 삽 파서 바랑에다 넣어 줬다. 그래서 인제 그 분은 마음을 살피러 왔으니까 ‘아하 이 사람이 장자로 살지만 참 마음이 이렇게 나쁘구나’ 이런 생각을 했겠죠. 그러고 그 분이 여기 이만큼 오셨대요. 여기 이만큼. 이 동네로 오셔서 고기가 원래 이만큼 비탈이예요. 그래 내려오시다가, 이렇게 강에 내려가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그게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하나의 전설이니까 그렇겠습니다만은 그 며느리가 여기 그 우물로 쌀을 씻으러 왔대요. 아침을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그래서 그 성인이 ‘이 집 남의 식군데, 이 사람 마음은 어떤지 한번 봐야 되겠다’하고 내려가서, 쌀 씻는데 내려가서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죠. ‘내가 집에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그런데 며느님이 ‘그러시냐’고 그러고 그 바랑을 보니까 그 소똥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빨아서, 그 강 연안이니까. 자기가 쌀 씻은 것을 정성껏 공양을 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남의 집, 이 분은 그 남의 집사람인데 마음이 착하고 갸륵하구나’ 이렇게 해서 데리고 ‘나를 따라 가자’고. 그래서 그 분을 우물에서 데리고 나와서 동행을 하는 거죠. 그래 인제 지금 고기쯤 가면 ‘절대로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어떤 일이 있드래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그러셨대요. 그런데 인제 별안간에 번개를 허고 천둥을 치고 소나기가 내리 쏟아지는데. 자기 시어머니가 불르는 거예요. 얘아가 아가하고. ‘장독간 덮었느냐’고. 그런데 그 스님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마음이 착하니까. 살리기 위해서 돌아보지를 말라고 그랬는데, 하도 그렇게 불르고 난리니까 돌아봤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거기 목이 떨어졌어요. 목이. 그 양반의 목이 떨어졌답니다. 그 목을 거기다 모셨다는 얘깁니다. 그 스님이 그래도 마음이 그렇게 갸륵했으니, 여기 서낭신이 되서 그저 오면 가는 분들한테 얻어 자시라고, 그래서 그 분을 모신 겁니다.

이 유래담에서도 나타났듯이 원래 서낭당에 모셔진 서낭신의 모습은 착한 며느리의 목 위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낭신체의 형상이 지금의 반신조형물(半身造型物)로 변하게 된 까닭에 대해 이종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종서 : 그래 이제 그런데 그분을 우리가 모셨는데. 그리고 해마다 동네 치성을 드리고 있는데, 육이오 전쟁 이후에 길 내고 이러느라고 그분이 목이 이렇게 떨어져서. 원래 그게 세멘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게 인제 돌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게 막 굴러 내려오고 이랬었어요. 그 길바닥까지. 그래서 그 분을 다시 그 공사 현장에다 이야기를 해 가지고 큰 높은 꼭대기다 그 분만 이렇게 모셨죠. 이렇게 잘 만들어 가지고. 그때 해놓았다 하드래도. 거 뭐 길 다리 내고 이런데 그렇게 잘 모셨드니 안 되서, 비가 와서 또 내려 굴르고 이랬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은 다시 모셔다가 지금 있는 위치에다가 조그많게 그렇게 해서 부끄럽습니만은 그렇게 해서 모셨거든요. 전과같이, 원래 같이 라는 것이 옛날 고대로 복원이 되야 하는데, 여러 가지 변형이 되었거든요. 그 머리 부분도 원래 잘 해서 모셔봤더니, 미군 아이들이 아주 큰 유물로 생각하고 지프차로 싣고 그냥 갔대요. 그냥 오며 가며 보다가. 그래가지고 저희가 여기 한 몇 분이 다시 그 돌 맨드는데 다가 얘기를 해 가지고요. 좀 이렇게 아주 가장 아름다운 여인상으로 이렇게 해서 상반신까지 이렇게 다시 모셨습니다. 지금은 그게 정식 복원을 하자면 지금 그 위치에다가 해야 되는데 그 위치에다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절벽이 돼가지고….
    조사자 : 도로가 나면서 그렇게 된 거죠?
    이종서 : 예, 도로 나면서.
    조사자 : 예전에 서낭신의 모습은 머리뿐이었어요
    이종서 : 요 머리뿐이었어요.
    조사자 : 아, 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있는 것이었어요?
    이종서 : 그렇죠. 그래서 도안을 해서 그것을 잘 이렇게 깨끗하게 아주 잘 맨들었어요. 요 목 부분을 보완을 해서.
    조사자 : 그러다가 미군들이 그것을?
    이종서 : 미군애들이 갖고 가 버렸죠.
    조사자 :처음에 머리만 있다가 목까지 있다가 다음에 없어졌다가 지금과 같이 상반신 형태로 된 거네요?
    이종서 : 예. 예. 아주 착하고 아름다운 며느리 상으로다가, 여인상이죠.

이 서낭당을 중심으로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시월 초에 마을 공동제의인 ‘대동고사’가 벌어진다. 이에 대해서 제보자 이종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종서 : 그래서 참 동네에서는 매년 음력 초삼일 안으로 날을 잡아 가지고요. 인제 그 동네에서 제주를 정합니다. 매년.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해서 동네에서 쌀도 내고 돈도 내시고 해서, 그 제수용품이라든지 이런 것을 차려서 매년 그 무병장수를 빌고 동네 발전을 빌었었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 ‘대동고사’는 매년 음력 10월 초사흘 안에 벌어진다. 혹 마을에서 초상이 나거나 부정이 생길 경우에는 한 달을 연기해서 11월에 한다고 한다. 생기복덕을 보아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주를 정하고, 제주를 중심으로 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도와주면서 대동고사를 드린다. 보통 대동고사는 마을 토박이들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는데, 제주를 비롯하여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만은 참여가 허가되지 않는다. 대동고사는 우선 현 서낭당 위쪽에 있는 도당나무에 가서 먼저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송재 : 이 위에 있어요. 이 위에 있는데, 그게 참나무예요. 옛날에 거기 나무가 큰 게 하나 있었어요. 있었는데, 그게 나무가 인제 작년 저거 하면서 없어졌고, 땅 주인들이 없앴고. 인제 해서 임시적으로 참나무에다가 인제 허는 거죠…. 옛날 장영자 별장 그 쪽에 있어요. 참나무들이. 그쪽 저 원두막 식으로 해 놓은 데, 그 쪽에 그 옆에 바로 있는 거예요. 인제 그건 시월 초하루 인제 고사 지낼 때. 대동고사 지낼 적에 거기다가 인줄을 쳐놔요. 미리 가서, 그때 보시면 확실히 알죠.

옛 장영자 별장 앞 오른쪽 산비탈에 있는 도당나무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서낭당으로 옮겨서 서낭제가 치러진다. 축(祝)은 따로 읽지 않고, 먼저 대동 소지를 올리고 그 다음에 집집마다 개인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보통 제주 집에 모여서 올렸던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일에 대하여 논의를 한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제보를 해주신 모든 분들이 쇠락해진 서낭당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서낭신의 유래를 말하면서 그 전통의 깊음을 계속 강조하였다. 통장 일을 맡고 있는 이송재 씨는 구체적인 진행 상황을 말하면서 새롭게 만들 성황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사를 하면서 만나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마을 공동제의인 대동고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자신들은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 말했다. 조사자가 만나본 제보자들 중에 가장 젊은 이명무 씨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미내 대동고사의 밝은 미래를 말해준다.

    이명무 : 저희는 모르지만. 매년 하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대동고사를 지내잖아요. 대동고사를 지내면은 보통 인제 토백이 분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이걸 제사를 지내요. 제사를 지내면 동네 분들한테 십시일반 모아서 이제 지내면서 거기 가서, 고 위에 장영자 별장 앞에 거기서 한번 지내고
    조사자 : 장영자 별장 그 나무에서 지내는 거죠?
    이명무 : 그 밑에요. 그 밑에 인제 거기 좀 고목이 있었는데. 거기 인제 공사하면서 없어졌나 보드라고요. 거기 인제 그 절벽 위에, 절벽에 거기 뭐가 좀 있었어요. 인제 거기서 지내고, 그 다음에 당제 거기서 지내고 그렇죠. 그래서 지내면, 다 지내면 동네 분들, 동네 잔치나 마찬가지죠. 다들 오셔 가지고 했는데. 그 내력이 알고 싶으시죠. 그 내력은 근데 인제 그건 동네 노인 회장 그 분이 잘 아세요. 인제 고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에 좀 우리 어릴 때는 인제 번거롭게 해요. 우리도 그런 거 많이 했거든요. 대부분 뭐 옛날에 우리 집에서 다 했으니까. 인제 많이 했어요. 인제나이가 들어서, 자꾸 알게 모르게 인수인계를 받는 거 같드라구요. 특히나 인제 일년에 대동 차례하면은 동네분들 하여튼 천 원이고 걷어서 음식 준비해 가지고제 지내고, 또 와서 동네 사람들하고 하는데, 요새는 인제 좀 그게. 요 동네도 원주민이 줄고 타 지역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인제 고게 인제 좀 약간 괴리가 생기죠. 인제. 고걸 잘 극복하면은 전통도 계승할 만 한 것 같아요. 계승할 만 한 것 같은데, 인제 얼마만큼 다들 생활에 저거 하니까. 생활에 저거 하다 보니까. 인제참여. 참여율이 예전 같진 않죠. 그리고 이게 누구든지 주도적으로 이걸 끌어가야 되요. 끌어서 하여튼 해야 되는데, 인제 이 동네도 예전에는 토백이분들이 많아서, 구심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동네 내 자체도 끌어가는 사람이 인제 좀 힘이 약하고, 그 다음에 전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 다음에 전체적으로 봐도 타향에서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의미가 좀 많이 줄었죠. 근데 헌데 저희가 나이가 좀 들면서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은 이런 거 계속 해야겠다.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어린 때는 귀찮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 이게 그게 아니구나. 이게 정성인데, 차례 지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