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l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토평동 벌말 경로당 옆에는 축대를 쌓아 높이 올린 ‘돈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치성을 드리는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두 그루를 각각 ‘도당낭구’, ‘서낭낭구’라고 일컬으며 위한다. 벌말 도당할아버지가 몸에 지폈다는 만신 이매화씨는 이 나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매화 : 이 도당낭구래는거는, 이제 말하자면 산으로 치믄 산신할아버지고, 이제 말하자면 이쪽 서낭은, 이 길 서낭이라는 게 있어. 우리네가 이렇게 풀으면은, 말하자면 오고 가는 사람 차 가지고 뎅기고 왜 자꾸 근데 올라가고 그러다가도 돌멩이들 싸놓지? 그게 옛날부터 서낭이야, 그게 돌 쌓아놓는게. 지금은 절 밑에 가면 돌들을 이렇게 싸놓고 그러지? 그런 게 아냐. 이 고개에 넘어 가는데 낭구, 서낭낭구라 해가지고, 인제 그거는 낭구, 서낭에는 청색 무색을 좋아해. 오색을. 그리고 인제원 도당나무는 산신, 높은 분이고, 말하자은 이건 제자야. 여기 동네 지켜주는. 그래서 서남, 군웅 그렇게 인제 불르지. 그러니까 서낭에는 아래고, 이제 말하자면 도당은 원 조종, 산할아버지, 산으로 치믄 산할아버지고. 그러니까 인제 서낭이라는 거는 마을 지켜주는 거. 지나가는 차를 보고 지나가면 이렇게 받들어 주는 거, 보조병, 말하자면 학교에도 선생이 교장이 있고 그렇지, 응? 반반이 선생이 있듯이, 그게 있는 거야. 게니까는 그건 보조하는 서낭이야, 서낭님.

제보자 김낙원 씨에 의하면, 원래 마을에서 모시는 도당나무와 서낭나무는 마을 아래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수가 나서 다 떠내려 가버려서 새롭게 현재의 장소에 다시 모시게 된 것이라 한다.

    김낙원 : 이게 우리 어렸을 적에 요만한 거였으니깐 적어도 칠팔십 년, 팔십 년 됐잖아요. 저게 더, 위에 서낭낭구가 저게 더 오래됐어요, 이거 보다. 저거는 우리 어렸을 때, 이만했는데 한 삼십년 더 빨라요. 더 일찍 심은 거라고 저쪽에다.
    조사자 : 거의 백 년이 넘었겠네요?
    김낙원 : 백 년이 넘었고, 요거는, 그래도 딴 데서 옮겨 왔으니까, 이것도 거의 다 한 구십년 되지 않았나? 그렇게 돼요…. 옛날에 저쪽에 있었는데, 다 떠나가고 없어요, 저 뭐야, 큰 장마가 져서 그냥 다 떠나갔어요, 없어졌어요.
    조사자 : 옛날 나무들은?
    김낙원 : 다 없어줬어요. 이제 그걸 갖다가, 혼을 갖다가 이리 모셔왔죠. 옛날에 이거 대단히 위했다고. 우리 어렸을 때에, 큰 한, 병자년에 장마가 져 가지고 여기가 다 떠나가다시피 했어요. 그 왜냐하면 가외는 다 물이 들고, 요기만 안 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그땐 여기가 얕아 가지고 돋갔죠. 을축년이면 아는지 몰라. 을축년에 더 큰 장마가 져서, 을축년엔 여기 집 한 채, 두 채 밖에 없고 다 떠내려갔어, 싹.

마을 사람들은 이 도당나무와 서낭나무에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와 음력 10월 초하루 깊은 밤중에 치성을 드린다.

    김낙원 : 그러니까 일년에 두 번씩 칠월 초하루 날, 그리고 또 뭐야, 초하루 날 지내고, 이게 시월 초하루 날 지내고 두 번 지내요.
    조사자 : 칠월 초하루 날은 그때는 서낭나무에다가 지내는 거예요?
    김낙원 : 음력이죠, 음력. 그때는 두 군데에 다 지내요. 밤중에, 밤 열두 시 넘어, 조용할 때에, 그러니까 칠월 초하루 날 새벽, 그러니까 새벽이 아니라, 새벽이 한시지, 새벽 열두시 넘어서 이것도(도당나무) 지내고, 이것 먼저 지내고 난 다음에 저거(서낭나무) 지내요.

치성은 현재 소머리를 고아서 제물로 쓰고, 만신인 이매화 씨가 간단한 비손을 드리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깨끗한 사람으로 당주를 뽑고 매우 엄격하게 금기를 지키면서 준비를 하고 치성을 치러 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당주를 뽑았던 방식이 아주 독특해서 주목된다.

    김낙원 : 바가지 알어? 박을 짜개지 않고 두는 것이 된박이야. 거 된박을 오래 두면 속이 바짝 말라 가지고 이렇게 파내면, 박이 되는 거야. 속이 텅 비었다구. 에 거기다가 인제 콩에다 이제 온, 깨끗한 분들 성함만 써요, 성함. 성함만 써 가지고 거기다 넣어 가지고 휘이 저어 가지고 퇴어 나오는 사람, 축원해 가지고 퇴어 나오는 사람이 당주가 되는 거여. 당주가 되가지고 떡집 되고, 또 한번 퇴어 나오는 집은 밥집이 되고.
    이연순 : 두 번째는 밥집.
    김낙원 : 그래 가지고 인제 그 굿헐 때 그 사람들이 다 깨끗한 몸으로 다 준비하는 거지.
    이연순 : 인줄 메고, 상주 안 들어오고, 뭐 아주 뭐든지 가리고 그렇게 했죠.
    김낙원 : 대단했지.
    이연순 : 그래야 인제 그 동네가 대동이 다 편안하고 정성 덕을 입고 다 그렇게 했죠. 우리도 그렇게 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의의 형태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인근의 무당들을 불러와서 하는 도당굿형태였다고 한다.

    김낙원 : 옛날에는 음력 시월 달에 동네에서 죄 쌀 걷고 뭐 걷고 그래 가지고 굿이 크게 벌어졌어요. 여기가 굿 크게 했었다고, 도당굿이라고. 이틀씩이나 했지, 이틀씩.
    조사자 : 예? 외부에서 무당들 불러와서?
    김낙원 : 어, 그렇죠. 무당들
    이연순 : 사흘씩 했는데요.
    김낙원 : 무당들 불러 와 가지고 아주 크게 했죠, 옛날엔.

이 마을에는 도당할아버지 신이 내렸다고 하는 만신 이매화 씨가 살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마을 공동제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당할아버지 신이 내린 경위와 예전 이 마을에서 벌어졌던 도당굿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매화 : …그렇게 고생하고 그랬는데, 보따리 장사 댕기다가, 별안간에 이렇게 몸이 아프고 막 지미가 끼고 꼬챙이 같이 말르는거야. 게드니 어느 날 갑자기, 괜히 인제 내가 괜히 별안간에 미쳐갔고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일흔 아홉에 돌아갔는데, 그지 그냥 보따리이고 나서 점심도 굶고 그런다고 애들도 어렵지만은줄 것도 안 주고 굶기는 거야. “어멈은 굶고 있는데, 무슨 느히는 밥을 먹느냐, 점심을” 해갔고 해서 이렇게 이렇게 댕기다 보니까는 그냥 내가 괜히 별안간에 미쳐갔고 그러니까. ‘아휴 우리 며느리가 돈에 환장해서 미쳤나 보다’ 허니까 노인네들이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 증세가 이상하니깐, 암만해도 살살 빌어보라고 허니까. 노인네가 일흔 아홉이나 잡수어 갖고 며느리한데 왜 그러시냐고 인제 빌고 그러믄, 내가 막 반말로 찍찍 허면서, ‘왜 사람을 몰라보고 저기 허느냐’고 그러구 ‘너희 집이 며느리가 불쌍해서 내가 살릴라고 도당제…’, 옛날에는 여기가 크게 청량리?동대문?중앙시장, 시장이 거기 밖에 없지. 그런데 인제 그 사람들이 다 와서 시월 초하루날이믄 이제 도당굿을 해, 대동굿을. 대동에서 걷어 가지고 낭구에다가, 돈대래는데, 거기에다가, 돈대가 지금, 여기 동네가 생겼지만, 여 동네 아래 지금 생긴데 언덕을 거기가 도당터였었거든. 그러니까 낭구가 없고, 그냥 이렇게 신식이 되니까 그냥, 피난민들이 오래갔다 얻다가 할 데가 없으니까 거기다가 그냥 땅들이 죄 이렇게 해갔고 집을 지어라 이래 갖고, 낭구를 죄 베어내고 이제 이러니까 동네가 뒤집히고 그러니까 돈대로 모신 거야. 말하자면 거기서 위해든 낭구를, 그래 갖고 이제 일년에 한번씩 굿을 허는데, 것도 지금 세상이 이래지니까 뭘 허우, 허기는. 동네분들이 뭐 노인데들이 참 본토집만 살았지, 여기는 세도 안들었어요, 사람들이. 세도 안놨어, 동네가, 어렵게 살아도. 헌데 지금은 돈 때문에 방들을 들여갖고 세를 놓고 그래서, 셋방살이가 더 많어 그러니까 교인도 생기고, 여기는 교래면 대경질색이야. 대동에서 이렇게 위했던 저거니까. 그리고 날 받아 놓으면, 그냥 딴 집이 떡도 못해 먹고, 죽도 못 쑤어 먹어. 팥도 못쌈고. 게니까 이제 날이 지내야 해먹지. 그렇게 엄했다고. 그런데 이제 점점 그냥 이 사람들이 방들을 들여갔고, 타동 사람들을 이제 주니까, 거 교인들도 이제 오고 뭐, 이제 별별 사람이 각국에서 뫼여드니까, 콩길대 모냥 저거 허니까 그냥 고만 둬 버렸어, 굿을 안허고. 그러니까 이제 내가 미쳐갔고 막 그러니까. ‘왜 이렇게 대동 일동에서 이렇게 굿을 안하느냐. 게다 너희가 안하면 내가 동네서 어른모시고 있으니까, 내가 그 양반 모시겠다, 산신할아버지를’ 이제 도당할아버지지 이제 이렇게 당산이야, 저 시골로 치면. 낭구에 인제 이렇게 모신 할아버지. 그 인제 일 년에 한 번씩 그냥 굿을 허믄, 왕십리 중앙시장 있잖어, 청량리, 또 동대문, 아주 그 시장패들이 다 와서 사흘을 굿을 허니까, 만신들이 각국에서 오고, 피리, 깡갱이, 뭐 삼잽이 앉히고, 동네 호가를 돌아요 이제, 사흘을 두고, 그전에 낭구대를 내려 가지고, 사면 팔방을 댕기면서, 이렇게 동네를 입싸고 이제 이렇게 허니깐. 그 사람들이 사흘 나흘 장사하는 사람들이 와서 부주를 하고, 사흘 나흘을 그냥 그 굿하는 데서 구경을 하고 이랬어.

이렇게 매년 시월 초에 벌어지던 도당굿은 지금으로부터 26년 전부터 완전히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마을제의는 소머리와 술을 올리고는 간단하게 치성을 드리는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이매화 씨는 깊은 아쉬움과 섭섭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마을 공동제의의 현재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매화 : 시월 초하루 날하고 칠월 초하루 날하고 했는데, 근데 그걸 없앴다니까, 그냥 아주. 그리고 인제 이장이 시월 초하루 날하고 칠월 초하루 날은 소머리 하나씩 닥 사다가 하믄, 날더러 오라고 해서, 인제 남구에 가서 비손허지. 그 대신에 내가 할아버지 대접하느라고, 벌어주셨으니까 그냥 일 년에 한 번씩 시월 달이면 이제 따로 굿을 해, 집에서 내가 그냥. 동네서 안허니까. 그러니까 대동이 편안하잖어. 그러니까 지난번에 통장이 왔길래, 내가 그랬지. 타국 사람인데, 통장을 뽑았대나. 이 국에 끓는지 밥에 끓는지 몰르지, 벌어먹고 댕기느라고. 그런데 와갔고, 낭구를 지붕에 가려서 잘른다고 그래. ‘그 낭구가 얼마나 엄한데 아무케나 그렇게 잘르겠냐’고. 그러면서 내가 딴 데는 뎅기믄 보호 낭구라고 왜 다 해봤잖아, 철망으로 해서. 여기는 인자 얼마나 엄한덴데, 낭구 밑에…. 그러니까 인제 본토집 사람들만 몇몇이 이제 여기 믿어서 통장이 예수쟁이래도 용서 없어. 칠월 초하루하고 시월 초하루는 소머리 사다가 과서, 바쳐야 돼. 한 시에, 밤 한시. 말하자면, 초하루 날, 그믐날 이제 해 가지고, 이렇게 짓고 들어앉아 해마다 허니까 동네도 편안하고, 그니까 그거지 뭐, 대동 일동 그저 나 살아서는 편안하게 그저 해 달라는 게 인제 저기지 뭐. 그찮어, 어차피 내가 이렇게 돼 같고,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은 사람인가, 도당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내가 있으니까, 그냥, 그저 대동 일동 섭섭하고 괘씸해도 다 벌 풀어서 그저 다 제치시고 봐 주십소서, 그거지 뭐.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그냥 고사를 지내도 내가 독단히 하지, 난 동네 가지고 가서 쌀가지고 와라, 초 사라 그런것도 없어. 똥구녁이 찢어지게, 어려서 젠장 밥 굶을 때도 그런 소리 안 했는데, 뭐 허러 그런 거 해. 안 허믄 그만이고, 그잖어 헐래면 내 정성껏 내가 허는 거지. 뭐 그걸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안해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