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인창동 궁말 산치성 l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인창동 궁말 ‘산치성’에 대해서는 그 동안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자 역시 이곳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인근 수택동 이촌마을을 조사하던 중에 제보자 이학원 씨로부터 인창동 궁말의 산치성에 대해 간략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이를 실마리로 하여 궁말의 산치성을 조사하게 되었다. 궁말에서 만날 제보자는 십여 년 동안 산치성 제물 준비를 맡아서 해온 김종원, 이옥선 부부와 현재 통장을 맡고 있는 한영식 씨였다. 이들의 제보를 중심으로 궁말 산치성에 대해 기술해 보기로 한다.
궁말에서는 매년 음력 시월 초에 마을 공동제의인 산치성을 드린다. 제의 명칭과 날짜에 대해서 제보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옥선 : 여기는 옛날부터 제사예요. 여기는 제사라고 해요. 산제사라고 해요.
    김종원 : 옛날부터 산제사.
    조사자 : 산치성? 산제사라고 불렀어요?
    김종원 : 산치성이라고 불르고 그랬어.
    이옥선 : 산치성날 받았다구 그러구. 언제든지 음력 시월 초하루서 초이틀 초사흘 요 사이에 지내요, 언제든지, 그래가지고 인제, 고 사이에 기우를 해야 되니까. 딴은 우리는 음식을 만질 사람이니깐, 기우를 하니까, 뭐 비린 거 이런 걸 될 수 있으면 안먹지, 그냥, 한 보름 한 보름 안 먹고, 암만 시대가 그래도 가릴 건 가린다고, 안먹죠. 옛날엔 나가서 자지도 못했대요, 산치성되믄, 날 받아 놓으믄.
    조사자 : 외지 사람 못 오게 하고요?
    이옥선 : 응, 그랬대요, 여기도.

언제부터 이러한 산치성을 지내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여기고 있다.

    김종원 : 언제 지냈는지 모르니까, 선대조 할아버지들이 여지껏 지내던 거니까. 거이 얼마나 됐는지 몰라요. 몇 백년 됐는지.
    이옥선 : 몇 백년이 된지는 모르고, 우리가 지금, 내가 맡아 가지고 한 지가 십 년이 넘었나 봐요.
    김종원 : 십년이 뭐, 그 저, 내가 아는 데 오래서부터 거 지냈으니까 몰르지 뭐 얼마큼 오래 된 거는.

그런데 산치성은 궁말 사람들만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옥선 : 지금도 사 동네가, 지금, 이 철뚝으로, 철뚝이 갈렸으니까 저 밑에 동네하고, 부락은 원래 그 동네하고 여기하고는 한 동넨데, 굴 바깥까지 경로당 있는데, 그러니까 그 동네까지 따로 허니까, 다섯 동네가 돼요, 오 동네,
    조사자 : 다섯 동네라면 어디어디 어디죠? 여기 궁말….
    이옥선 : 양짓말, 베틀고개, 응달말, 그게 네 동넨데, 지금 여기 철뚝이 놔져서, 거기도 궁말인데, 그 우리가 통장이 다르니까 다섯 동네가 되는 거죠.
    김종원 : 지금도 네 동네에서 지내는데, 사람 숫자가 늘지를 않아요. 그 전에 살던 사람만지내고 새로 온 사람들은 안 허고.
    이옥선 : 새로 와서도 이해하는 사람은 허고. 몇 되? 그러는 사람이 … 안하는 사람은 허든 사람도 안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이처럼 인근의 양짓말, 응달말, 베틀고개 사람들까지 함께 산치성에 참여한다. ‘산치성장부’에 따르면, 1999년의 경우 네 개 마을 6개 통에서 총 127명이 참여하여 제의 비용을 함께 부담했다. 네 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갹출하여 산치성을 지내는 것이다. 제보자들에 따르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현재의 인창초등학교 옆에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집은 다른 지역의 당집처럼 신을 모셔 놓은 장소가 아니라, 산치성에 쓰이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이자, 제사에 쓰일 음식들을 1차로 준비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김종원 : 여기는 그 전엔 요기 지금 인제, 철도 날, 지하철 나는 고 밑에 고기 큰 느티나무가 두 개가 있었어요.
    조사자 : 아, 저기 전봇대 있는데요.
    김종원 : 네, 근데 인제 다 죽고 없어졌지만, 거기 고 밑, 바로 그 느티나무 밑에다가 집을 하나 쪼금 당을 지어 가지고 인제 거기서 뭘 채리는 저거는 거기다가 놔두고 지냈는데 … 느티나무 밑에 인제 당이 있었다고.
    이옥선 : 거기서 음식 맨드는 집이 있었어요.
    김종원 : 인제 그게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느티나무까지 다 죽어 버렸어.
    조사자 : 당집이 있었을 때, 그림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옥선 : 아니 그런 건 없었지. 그런 건 없고, 이제, 집. 그게 그 그릇, 유물들 쓰느라고. 뭐 시루같은 거, 그 전에는 다 집에서 했잖아요. 그릇 같은 거 그런 거 두느냐고 그게 있었고 … 사람들이 그게 거기서들 떡방아 빻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인제 익히고 그러는 건, 산에 올라가서 다 익히고….

산치성을 지내는 장소는 인창초등학교 뒤쪽에 동구릉산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에 있다. 산치성은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에서 지낸다. 그리고 짚주저리 만들어 놓고 음식을 익히는 장소가 따로 있다.

    김종원 : 근데 지내는 거는.
    이옥선 : 산에 올라가서 지내.
    김종원 : 저 위에 가서 죄 걷어가지고, 한푼 씩. 이제 거기다 얼마씩 걷어 가지고 거기 지내고, 고걸 지내고 나서, 또 다시 죄 떡이고 뭐고 노놔서 인제 다 돌라주고…
    이옥선 : 그래 갖고 인제, 인제, 인제 제일 정갈하고 깨끗한 집을 골라서, 그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인제 산에 올라가서 지냈죠. 지금 굴….
    김종원 : 저 굴 뚫는 고 옆에, 고기서 지냈는데.
    이옥선 : 산에 올라가서 지내고 그러다가는 … 지금도 거기서 지내는데.
    김종원 : 거기 세 군데 지내거든,
    조사자 : 세 군데요?
    김종원 : 세 군데 지내는 데는, 그 전에는 인제, 지금은, 지금도 주저릴 맨들지. 그 전에는 인제 그 짚으로 까는거까지 죄 맨들어 가지고 올라가서 지내고.
    조사자 : 짚주저리요?
    이옥선 : 터주 주저리 맨들어서
    조사자 : 맨들어서 갖고 가서는요?
    이옥선 : 지금도 그거는 허는데, 허믄 내려오면 금방 없애겠죠, 애들이(웃음).

이렇게 짚주저리를 만들어서 놓고 음식을 익히는 곳과 산치성을 드리는 세 장소의 위치를 대략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산치성 드리는 장소 ]
1 : 첫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2 : 두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3 : 세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4 : 짚주저리를 만들어 놓고 음식을 익히는 곳

이렇게 세 곳에 걸쳐 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그 각각의 장소에 깃들여 있는 신격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는 세 군데에 올려지는 제물이 각각 변별된다는 점에서도 입증이 된다. 그런데 제보자들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피력하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신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영식 : 고기 인제 지내는 데가 따로 따로 세 군데가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인제 떡은 이제 시루가 공동으로 다 올라가고, 떡 한 시루씩은. 그러구 인제 소족 놓고 지내는 자리가 다르고, 북어하고 두부하고 놓고 지내는 데가 달르고, 또 머리 놓고 지내는데가 달르고, 그래 세 군데에 놓고 지내요. 그 유래는 몰라요. 어떻게 돼서 그러는지, 나도(웃음).
    김종원 : 지내는 데가, 세 군데 지내는 데가 따로 있다고, 자리가.
    조사자 : 산에요? 어떻게, 왜 세 군데예요?
    김종원 : 몰라 우리도.
    이옥선 : 나도 모르는데, 뭐 산신. 얘기가
    김종원 : 소머리 갖다가 지내는 데 있고, 떡만 갖다 지내는 데 있고, 북어하고 과일만 갖다놓고 떡하고 지내는 데가 있고 그렇거든.
    이옥선 : 저기, 산적도 쓰니까. 산적은 세 군데를 다 쓰고, 그러는데, 알기는, 그 전에 저 사무장님이 말씀하시기는 이쪽 끝에 마지막에 족허고, 소머리허고 다 올라가는데는, 북어 넷까지 다 올라가는 데는 마부라고 그러십니다, 마부라고.
    조사자 : 마부요?
    이옥선 : 마부라고 그러시고, 마부니까 여긴 다 놔야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현재 통장 일을 맡고 한영식 씨에게는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산치성 제반 예산이 기록된 「산치성장부」가 있다. 이 속에는 ‘치성제물 배열순서’라 해서 치성을 드리는 세 군데에 각각 올려지는 제물을 기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쳐 치성 제물들의 항목을 조금씩 바꾼 흔적이 보이는 이 기록 중에서 맨 나중에 기록되어 있는 제물 배열순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숫자는 산치성을 올리는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① 떡, 과일, 두부, 나물, 산자, 밥
    ② 떡, 북어 3마리, 산적
    ③ 떡, 소머리, 우족

현재의 산치성은 네 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준비하고 있다. 1999년의 경우 각 호당 7,000원씩을 갹출했다. 산치성에 대한 제반 준비는 각 통장들이 맡아 하고 있으며, 김종원 이옥선 씨 부부가 음식을 준비하고, 제과 한 명이 선정되어 치성을 주관한다.

    조사자 : 산치성을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이예요?
    김종원 : 하나지, 절하는 사람은 하나다. 두루마기 입고, 두건은 안하고.
    이옥선 : 우리가, 한 십년 째 내가 다 하고 그랬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두루마기, 한복 두루마기 입고 그러구 가서 축문 읽고….

산치성은 우선 음식을 익히는 장소에 가서 한 쪽에 터줏가리를 만들어 놓고 치성에 쓰일 음식들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날에는 음식을 익힐 때에 사용되는 물은 인근의 당우물에서만 길어왔다고 한다. 현재 이 우물은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인창동 615-6번지 집 앞에 남아 있다.
음식이 다 익혀지면, 첫 번째 치성을 드리는 곳에 가서 정해진 제물을 올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이어서 두 번째 치성 장소와 세 번째 치성 장소에 가서도 같은 방법으로 치성을 드린다. 마을에는 산치성 때 읽는 축문이 전하고 있는데, 현재 한영식 통장이 보관하고 있는 산치성 축문 견본은 다음과 같다.

[ 산치성 축문 ]
祝文
維歲次庚午(年)十月朔初一日 丙戌 幼學 ○○○(제주명)
敢昭告于
土地之神 今爲山神之位 仁倉洞中人民
官災口說三災八難 牛馬鷄犬家畜一切
無害有德祝願 神其保祐 無後難
謹以淸酌脯醯 視薦于神
尙響

세 장소에서의 산치성을 모두 마치면, 치성에 쓰였던 제물들을 꼭 같이 나눈다.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떡 한 쪽, 과일 한 쪽 등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영식 :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그 제물 같은 거 이런 거 준비하는 과정만 하고요, 이제 여기 그 전에 원주민들로 해 가지고 그 해에 물가를 대충봐 가지고, 인제 떡하고, 북어하고, 소족하고, 소머리하고, 두부 몇 하고 거 지내는 게 몇 가지 있어요. 그걸 인제 공동으로 저거하믄, 그 걸 지낸 다음에 그걸 똑같이 다 나누죠. 정성이라 그래가지고 떡도 이렇게 하나씩 맨들어 가지고 나누고, 그리고 이제 밤같은 거, 대추같은 거, 감같은 거, 인제 골고루 이렇게 다 나눠 가지고…. 그것밖엔 없어요. 다른 건….

이렇게 언제부터인지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거행되어 오던 궁말 산치성의 미래는 그리 밝지가 않다. 당집은 이미 사라졌고, 산치성을 지내는 장소 밑으로는 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산치성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오던 ‘사무장’이라 불리던 어른 역시 돌아가셨다. 적극적으로 제보를 해준 제보자 한영식 씨 역시 ‘금년부터 해야 되려나, 저 그 걱정거리예요, 아 저쪽에 그 밑에를 전철 관계로 파 놓아 가지고. 뭐 직접 그 자리는 아닌데, 이렇게 날 받고 이러든 노인네가 돌아가셔 가지고….’라며 궁말 산치성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